전에 철학 관련 강의('생명의료윤리', 의외?로 과목 이름과는 다르게, 철학 쪽의 수업이었다.)를 들었던 게 기억에 오래오래 남아서 다시 한번 떠올리며 글을 써 본다. 한가지 미리 짚고 넘어가자면, 이 수업과 그 수업 중에 교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많은 논지는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들이 많이 있었다. 지금 역시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이 상당히 많지만, 최소한 '또 다른' 방향으로 생각할 여지가 있음을 발견한 것은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렇게 또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스스로에게 나름 자부심을 느끼게도 해 줬다.

그 수업 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고, 내 마음 속에서 저항을 느끼게 했던 것은 이것이었다.

'만일, 어떤 테러리스트가 전국의 초등학교에 폭탄을 설치하고 테러리스트가 지목하는 한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폭탄을 터뜨려서 모든 초등학생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경우(대피시킨다거나 하는 선택지는 불가능하다. 철저히 통제된 조건을 전제로 한 사고전개다.)에 그것을 거부하고 초등학생들을 죽게 해야 하는가, 아니면 테러리스트의 협박을 수용해서 그 한 사람을 죽이고 수많은 초등학생들을 구해야 하는가'였다.

그때, 처음에는 전국이 아니었고, 적은 수의 학교부터 시작해서, '그래도 테러리스트의 요구를 거부하겠는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져서 어디까지 사람이 남아있나 확인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는...

전국의 초등학생들이 전부 폭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테러리스트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에 대해 교수님은 '이런 생각은 어렸을 때부터 세뇌를 받아서 그렇다'고...-_-;
이 얘기를 다른 사람한테 했을 때는 이런 대답이 나왔었다. '그건 공리주의적인 것 같고, 님은 의무주의인 것 같음!'

그런데, 이 역시, 수업 내용 중에 나왔던 거기도 했지만, 여기서 '테러리스트의 요구를 받아들여 수많은 초등학생들을 구해야 한다'는 것은 공리주의 철학자들만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나로써도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말 그대로, 테러리스트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은 악(惡)에 굴복하는 것, 즉, 방법론적이고 원칙론적인 부분을 어기게 되는 일이지만, 수많은 초등학생들이 사망하게 된 것은 선을 지키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어쩔 수 없는 결과(Collateral Damage)라고 말이지. 그러니까, 나는 '얼마나 많은 피해가 생기느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어떤 과정을 통해서, 어떤 원칙을 고수하면서 발생하는 피해인지'를 더 신경쓰는 것이다. 즉, 올바른 과정을 지키기 위해서 발생한 피해라면, 그것이 얼마나 크든 상관없이 나는 그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뭐, 저 '테러리스트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공리주의 철학자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인 철학계의 입장인지 여부와는 별개로, 나는 철저히 의무주의 쪽이긴 하다.


이것보다 조금 더 기억에 남았던 것은 이것이었다.
예전에 브리지뜨 바르도가 우리나라의 개고기 문화에 대해서 '야만적이다'라고 한 것에 대해, 모 국회의원이 '문화 상대주의도 모르고 야만적이라고 하느냐? 상대주의도 모르고 야만적이라고 하는 네가 더 야만적이다'라고 한 사안에 대한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1. 문화는 가치판단이 개입되지 않는 개념이다. 여기서는 '윤리'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하며, '문화'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부터가 오류이다.
2. 설령 '윤리상대주의'라는 개념을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정말로 윤리상대주의를 관철하는 윤리관에서는 '타 윤리에 대한 비판을 가할 수 있는 윤리'조차도 상대주의의 일관된 흐름의 일부로써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는 것이었다.

음, 언뜻 보기에 브리지뜨 바르도를 편드는 것 같아서 바로 받아들이기 미묘한 부분도 있지만... 생각해볼 여지가 발생한다는 것에는 의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사안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브리지뜨 바르도의 말이 옳다"는 것이 아니다. "브리지뜨 바르도의 발언을 비판하려면 '상대주의'라는 수단을 동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사안이 중요하게 인식되는 것은 내 스스로 비슷한 부분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생각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즉, (특히 그녀의 일에 대해서) 종종 언급됐던,

'자신의 정의를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라'

는 말에 대해서 말이지.

이 말은 나로써는 도저히 납득하기가 힘든 말이었다.

왜냐하면 첫째로, 정의란 것은 기본적으로 강요될 때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뭐든 정의라는 이름으로 강요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정의'라는 이름 아래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지, 그것이 올바른지 그른지는 엄중한 가치판단을 거쳐야 한다. 다만, 그 가치판단을 통해서 정말로 그것이 올바른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면 그에 상대되는 '올바르지 못한' 것에 대해서 '정의'라는 이름으로 어떤 강요, 내지는 제재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져야만 보편적 정의가 관철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면, 중범죄자가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을 거부하면서 '당신들의 정의를 내게 강요하지 말라. 나에게는 이것이 정의다'라고 한다고 해서, 그걸 '아 그랬군요, 죄송합니다.' 하고 그냥 보내준다는 것은 말이 안되지 않은가? 즉, 이 경우에는 이와 같은 중범죄자에 대해 법의 응당한 심판이 가해지는 것이 보편적 관념의 정의로써 이미 자리잡고 있다는 의미이다. 즉, '강요'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의의 구현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해진다. 사실 이런 경우에는 '강요'가 아니라 다른 용어로 대체하고싶은 느낌도 드는데... 딱 내가 사용하고 싶은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가 잘 눈에 안띈다.

둘째, 이건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이번 수업을 들으면서 들었던 생각인데, '자신의 정의를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이미 '타인에게 정의를 강요할 수 있는 정의'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보편적이고 엄정한 논리적 근거를 갖춘 정의관에서 출발한 주장이라기보다는 '참견하지 말라'는 감정적 표현에 가깝다는 의미이다.

셋째, 사람들 모두가 서로에게 서로의 정의를 강요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결론적으로 악이 많은 이득을 얻고 승리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 정말로 정의로운 사람들은 자신의 정의를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자기규율에 구속을 받겠지만, 악한 사람들은 그와 같은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고, 사실상, 악한 사람은 타인에게 자신의 정의(하지만, 이 경우의 정의가 가진 가치판단의 내용은 악에 가까울 것이다.)를 강요하며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결과적으로, '힘이 곧 정의'라는 단순한 결론으로밖에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뭐, 이 밖에도 생각나는 것들이 굉장히 많다.
어쨌든... 지금은 좀 쉬자.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 대지진 사태  (0) 2011.03.12
번뇌  (0) 2011.03.12
아이팟을 야하게 듣는 법  (1) 2011.03.10
컨디션이 안좋다.  (0) 2011.03.09
가면  (3) 2011.03.08
Posted by 루퍼스

블로그 이미지
루퍼스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글 보관함